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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여행/터키

셀주크의 에페스 유적지를 거닐어보자

 

 

 셀주크,에페스(SELCUK, EPHESUS) 

 

터키 에게해 연안의 서쪽에 자리한 셀주크는 고대 단일 유적지로는 최대 규모인 에페스 유적지를 가기 위한 기점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고대 역사에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던 도시이다.

 

12세기경 그 지역에 거주하던 터키 부족에서 이름을 따 온 셀주크는 도시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의 다신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각각 다른 세 종교가 그 체계를 정립하고 전파시켰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으로 그 흔적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셀주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신성시한, 다신교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과 후에 셀주크가 기독교를 정립한 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면서 기독교의 상징으로 세워진 성 요한 교회 church of st. john 와 그의 무덤 뿐만 아니라 이자 베이 사원isa bey mosque  은 이슬람교가 셀주크에서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으로 도시의 대표 유적으로 꼽는 것들이다.

 

에페스는 셀주크와 함께 발전한 도시로 에페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중요한 유물들은 셀주크에 위치하고 있는 에페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셀주크와 에페스는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일정으로 먼저 셀주크의 오토가르 근처의 에페스 박물관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박물관 일정 후 성 요한 교회와 이자베이 사원을 둘러 본 후 오토가르로 돌아와 에페스로 가는 돌무쉬를 이용해 에페스 유적지로 이동하여 유적지 지역을 둘러본다. 그러나 일정에 여유가 없다면 성 요한 교회와 이자베이사원 일정을 생략하고 아르테미스 신전과 에페스 유적지만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에페스 유적지 (Ephesus) 

 

고대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 왔거나 아주 잘 복원된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가 부족할 만큼 훌륭한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를 통과해 에베소의 역사라고 쓰여진 반가운 한글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길을 따라 원형 극장, 대리석 길로 유명한 마블 스트리트, 에페스 유적지의 핵심 셀서스 도서관을 볼 수 있다. 바로 앞에 공중 화장실,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졌던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있으며 진품은 에페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공회당과 의회가 열렸던 오데온, 로마 목욕탕의 형태를 보여주는 바리우스 목욕탕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위쪽 입구로 나와 내려오는 길에 신앙을 위해 일곱명의 청년들이 성벽 안의 동굴로 피했다는 전설이 있는 잠자는 7인의 집으로 갈 수 있으나 도보로 걷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찍 일어나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나선다. '셀축'행 버스가 오전9시에 출발이라 서두른다. 터미널이 석회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밀밭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히에라폴리스북문까지 20분가량 걸었는데, 그 후에 더 걸어야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제 metro직원이 오전 7시50분에는 숙소에서 출발하라고 했던걸 보면 그때쯤 돌무쉬가 오는 모양이었다. 8시경에 과연 돌무쉬 한대가 흙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게 아닌가?

 

돌무쉬는 작은 마을의 골목골목을 돌며 승객들을 태운다. 올라 타면서 서로 서로 인사를 한다. 동네가 아담하다보니 왠만하면 아는 사이일 것이다. 아르테미스호텔 앞에서는 어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이 여러명 탄다.  그 후 5분을 더 달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걸어 왔으면 예약한 버스를 놓쳤을 것이다.

 

오토가르에 내리니 두명의 한국여학생과 프랑스남자가 서성인다. 그들도 나와 같이 셀축행 버스를 타려는 중이다. 화장실에 다녀와서(유료 0.5L)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탄다.

 

내 옆자리에 그 프랑스남자가 앉는다. 몸집이 비대하여 자리에 꽉 차고 비염이 있는지 숨을 쉴때마다 온몸을 들썩거린다. 호기심 발동으로 말을 붙여본다.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에 꼭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자, 본인은 수염이 꼬부라진 화가를 제일 좋다한다고 한다. 내가 'he is a crazy man'이라고 하자 'genius crazy man'이라며 존경을 담아 정정한다.

 

 

 

 

 

 

 

셀축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오토가르에 내리자마자 각자 인사도 없이 흩어진다. 셀축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다시 야간버스를 타야한다.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우선 가게에 들어가 물과 음료를 산다. 레몬맛이 나는 음료다.

 

오토가르 옆은 재래시장이었다. 와아~ 갑자기 반가운 지인을 만난듯 즐거워진다. 현지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시장이므로 언제나 가면 좋다.  체리, 왕오디, 허연오디, 토마토등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야채를 수북히 쌓아 놓고 팔고 있다.

 

특히 토마토가 어찌 그리 싱싱한 붉은색인지, 보기만해도 군침이 돈다. 우리나라는 덜익은 상태에서 수확하고 유통이 되면서 후숙이 돼 꼭지가 시들하고 맛도 밍밍한데, 여기는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인지 꼭지는 싱싱하게 살아있고, 전시용으로 잘라놓은 단면은 와우~ 환상의 붉은색이다.

 

시장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둘러보기로 하고, 일단 명승지부터 가봐야 하니 에페스행 돌무쉬에 올라탄다, 돌무쉬 맨 앞자리에 앉은 동양인의 모습이 살짝 있는 서양여자가 봉지에 담긴 체리를 열심히 먹고 있다.  혼자 여행중인 것 같은데 나만큼이나 얼굴이 두꺼운 여자다.

 

10여분을 달려 에페스에 도착. 역시 유명지답게 인파 인파. 그런 곳에 빠지지 않는 한국단체관광객. 간만에 한국인들 많이 보네. 입장권을 끊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한바퀴 둘러본다. 실수했다. 오토가르에서 표를 예매하고 가방을 맡기고 왔어야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 때문에 구경이고 뭐고 기진맥진해 대충 눈도장만 찍고 후다닥 돌아 나왔다. 다른 팀들은 여유롭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데 ㅠㅠ.  돌무쉬에서 체리를 먹던 여자를 다시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유적의 터가 어마어마하다. 대부분 원형이 소실되고 그 중 보존이 잘 된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잔재들만 남았지만, 예전의 영화만큼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근처에 있어 꼭 가보고 싶었으나 땡볕에 이미 녹초가 되어 더이상 돌아다닐 엄두가 안나 제낀다. 즐비한 단체버스 사이로 나와같은 뚜벅이 여행객들 몇몇만 돌무쉬를 기다린다.

 

 

 

 

 

에페스유적 입구

 

 

 

 

 

 

 

 

 

 

 

 극장 Theatre 

 

에페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여겨지는 극장은 아르카디아 거리 맞은 편의 파나이르 Panayir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극장의 규모가 워낙 크고 경사진면에 위치하고 있어서 에페스 유적지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BC 3세기경 헬레니즘 시대에 지어진 것이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된 것은 로마 시대 때이다. 극장은 25,000여 개의 좌석을 가진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좌석 사이의 길은 가로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좌석의 열은 66개에 이른다.

 

좌석은 3구역으로 나뉘는데 제일 아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황제의 금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좌석들은 중요한 관료 및 정치가와 같은 상위 계급들을 위한 예약석으로 사용되었다. 일반 관객들은 위쪽의 출구를 이용해야 했다.

 

극장의 무대는 18m 높이로 3층으로 되어 있으며 무대 정면은 객석을 향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구역에는 5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가운데 입구는 나머지 것들보다 크게 지어졌다. 무대의 외관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더 크고 화려해지게 되었다.

 

극장은 단지 콘서트와 연극을 위한 공연뿐만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논의가 필요할 때도 사용되었으며 검투사와 맹수와의 결투가 벌어질 때는 검투장으로도 사용 되었다.

 

 

 

 

 

 

 

 

 

 

 

 셀서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잔해로 남은 지금의 모습도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당시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지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에페스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셀서스 도서관은 AD 135년에 소아시아의 로마 지방 정부 관료였던 셀서스 플레마애너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입구 맞은 편의 지하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책의 진열장 뒤로 이중으로 된 벽이 있었는데 이것은 습기로부터 책의 부패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도서관에는 약 12,000개 이상의 두루마리로 된 서적이 있었다. 도서관은 2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데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전면에 세워져 있고 그 뒤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3개의 입구가 있다. 가운데 입구는 양 옆의 다른 입구보다 그 크기가 크다.

 

전면의 입구 양 옆으로 4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현재 볼 수 있는 것들은 진품의 복사본이며 이것들은 각각 지혜, 지식, 지성, 미덕을 상징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문  Hercules Gate 

 

쿠레테 거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문으로 헤라클레스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헤라클레스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BC 4세기경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왔지만 실제로 문에 새겨진 조각은 BC 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두개의 열주 만이 남아 있으며 다른 부분들은 아쉽게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마리우스 욕장 (Bath of Varius) 

 

AD 2세기에 대리석 조각으로 지어진 욕장은 차가운 물, 더운 물 그리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이 욕장의 발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다산의 상징, 아르테미스 신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델로스섬에서 태어난 제우스와 레토의 딸로 태양의 신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 사이이다. 올림푸스의 12신 중 세 명의 처녀 신 중 하나로 아르테미스는 순결의 상징이었다. 이때문에 에페스의 아르테미스상의 모습은 여러 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아르테미스의 생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실제로 숲에서의 수렵과 사냥을 즐겼는데 숲을 주관하는 어머니신으로서 동식물의 출산과 번식을 주관하는 것으로 여겨 다산의 신으로 신성시 된 것이라 한다. 

 

 

 

 

 

 

 

 

 

 

 

 

 

 

 

 

 쿠레테 거리 Curetes Street 

 

셀서스 도서관과 헤라클레스 문 사이에 난 길로 로마 시대의 성직자를 칭하는 '쿠레테'라는 말에서 착안된 거리이다.

길 양 옆으로 열주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었는데 이는 보행자들을 눈이나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쿠레테 거리 주변에는 상점, 조각상과 같은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에페스에서 발생했던 잦은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결과 지진이 있은 후 BC 4세기에 도로 양 옆의 열주들은 다른 건축물에서 가져와 대체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열주의 디자인이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의 상젤리제가 있다면 에페스에는 쿠레테가 있다.

 

 

 

 

 

 

 

여전히 복원중이다.

 

 

 

 

 

 

 

아래:아스테미스신전 모형   위키백과 참조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처음의 그 웅장함도 결국은 지난 세월 여러 차례의 파괴와 재건에도 불구하고 함께 무너져 아쉽게도 오늘날에는 그 터와 몇 개의 커다란 기둥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전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장식들과 조각들은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첫 번째 신전은 BC 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36개의 거대한 열주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는데 후에 리디아의 왕이었던 크레이소스에 의해 증축되었다. 새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은 BC2세기에 지어졌는데 125개의 기둥과 17.5m에 이르는 높이로 지어졌다. 그러나 회재로 인해 신전은 붕괴 되었고 알렉산더 왕에 의해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했으나 지진으로 인해 또 파괴되었고, 다시 세워진 신전은 고트goth족에 의해 한번 더 파괴되었다. 다시 한 번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이 시기에 세력을 확장하던 테오도시오 왕이 다신교를 금지하는 법령을 내림에 따라 신전의 재건축은 중단되었다.

 

당시에 남은 잔해들은 다른 건축물을 짓기 위해 사용되면서 그 지역에는 아무것도 남지 남지 않게 되었고 신전이 있던 터는 처음에는 편편한 대지였으나 차츰 습지로 변해 잔해들은 땅으로 가라 앉게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영국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된 신전의 잔해는 현재 에페스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보질 못해 검색하여 첨부.